2024.05.0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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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골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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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골 전략

 신용카드 정보유출과 관련해 “금융소비자도 신중해야 한다. 정보제공에 동의하지 않았느냐”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지고 걱정만 하는데 현명한 사람은 이런 일이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현오석 부총리의 말은 ‘어리석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현 부총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웬만큼 똑똑하지 않고서는 입학원서도 낼 수 없었던 명문고교와 명문대를 나와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해서는 재무부를 비롯해 어리석은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여러 조직에서 사회적 경력을 다지고 한국의 대표적 두뇌집단인 KDI의 원장까지 지냈다.

 이런 그가 아무 생각없이 국민적 반발과 비난이 빤히 예상되는 발언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제 탓보다 남 탓 먼저 하는 건 우리 국민만의 속성은 아니니까. 예수님도 ‘제 눈 속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 속 티끌만 보는’ 우중(愚衆)의 어리석음을 심하게 꾸짖었으니. 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이제는 ‘소를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로 바꿔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잃은 소를 아쉬워만 말고 외양간을 고쳐 다른 소를 도둑맞는 일은 막자는 뜻이란다. 이런 생각에서라면 국가 지도자급 인사들은 이와 같은 발언은 언제든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잘못된 의식과 관행을 선진화하는 것도 그런 사람들의 책무이니까.

 그러나 그는 즉각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다”고 머리 숙였다. 이걸 보면 이 발언은 평소부터 깊이 생각해온 소신과 철학을 담은 게 아님이 분명하다. 소신이라면 즉각 사과 했을 리 없다. 사과는 커녕 자신이 옳음을 계속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측해본 게 ‘내 목을 쳐달라’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는 지난해 박근혜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로 내정된 이후 지금까지 별로(어쩌면 한 번도) 좋은 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청문회에서는 세금 늑장납부와 병역문제 등 도덕성 문제와, KDI원장 시절 받은 리더십 평가가 바닥권이었다는 등 능력 문제까지 불거져 개인적 망신을 당할 만큼 당했다.

 부총리가 되어서도 경제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잘했다는 평은 별로 없다. 대신 부처 간 조정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거나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창조경제의 보급과 실천에도 앞장서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였다는 평은 많았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여건도 좋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성장동력이 떨어져 경제는 지지부진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양적완화 철회, 중국의 성장둔화로 인해 새로운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칠 우려가 높다. 제대로 못하면 경제정책의 실패를 몽땅 뒤집어쓸 판이다. 짐은 무거운데 갈 길은 멀고 몸은 힘들고…, 그런데도 사방에서 빨리 가라고 다그치는 그런 형국이다.

 그래서 이번 신용카드 정보유출을 계기로 그만두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표를 내는 건 괘씸죄가 적용될 수도 있고, 반려될 수도 있지만 실언은 한 마디 제대로만 하면 된다. 부하 직원의 말 실수 때문에 날아간 사람도 제법 있었지 않나. 예전 똑똑한 사람들은 칭병(稱病)이나 부모봉양을 내세워 물러났지만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니 ‘자책골 전략’도 그럴듯해 보인다. 망신스럽긴 하지만 새삼스런 건 아니고, 부총리까지 했으니 더 바랄 게 뭐 있냐는 생각도 할만 했을 것 같다.

 이 추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필요하면 즉각 사과할 용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현 부총리는 국민 다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말은 남기고 싶다. 부총리 취임식 때 ‘중산층을 복원하고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되겠다’고 말한 걸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경제에서 한 가지도 시원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현 부총리는 자신이 원하든 아니든 물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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